https://namu.wiki/w/%EB%B6%88%EA%B5%90

 

 

*사성제인 고, 집, 멸, 도(苦, 集, 滅, 道) 4가지 진리를 받아들인다.
*중도의 진리를 받아들인다.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되며, 특히 자비는 무한이며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

  자비의 구체적 실천으로 보시를 강조한다.
*팔정도의 수행방법이 있다. 팔정도는 올바른 견해, 올바른 의도,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깨어있음, 올바른 집중의 8가지 수행을 뜻하며,

 앞서 언급한 사성제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도'가 바로 이 팔정도를 가리킨다.
 변하고 실체가 없는 허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모든 번뇌를 야기한다고 본다. 이를 없애기 위한 수행, 참선이 강조되며

 허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서 직시란 '단견'과 '상견'의 관점을 모두 버려

 대상을 치우침 없이 적관하는 것을 말한다.
 6바라밀 중 보시는 베푸는 것,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 인욕은 고난을 참고 이겨 나가는 것, 정진은 노력하는 것,

 선정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집중으로 팔정도의 올바른 집중(정정)에 해당된다.
 실제 석가모니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따위를 고민치 말고,

 지금 당장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집중하여 현실을 살라.'며

 저승에 대해 비중을 두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말라고 가르쳤다.

 이는 현실을 직시하는 경향이 강한 불교의 색감이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사성제
苦聖諦
Dukkha
사성제의 첫째는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고성제(苦聖諦)이다.

集聖諦
Samudaya
둘째는 그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으로, 괴로움의 원인은 한가지로 요악되니 무명, 즉 '알지 못함' 혹은 '어리석음'이다.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것인가? 괴로움이 집착과 갈애에서 비롯됨을 알지 못하며,

집착의 대상과 집착 자체와 집착하는 주체가 모두 십이연기로 조건지어져 찰나생찰나멸함을 알지 못한다.

괴로움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유지되며 어디로 향하는지,

그 원리와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12가지 상호의존적인 단계(十二緣起 paîṭcca-samuppāda)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12연기의 설명에서 무명無明, 잠재적 형성력行, 식별작용識, 정신과 물질名色, 눈·귀·코·혀·몸·마음 등의

6가지 감각기관六處, 접촉觸, 느끼어 받아들이는 작용受, 갈애愛, 집착取, 생존有, 태어나는 것生,

늙고 죽는 것老死 등의 12가지 요소가 어떻게 반복 순환하는지를 다룬다.

이 12연기의 순환과정이 곧 불교가 말하는 '윤회'이다.

이 순환과정을 끊는 사람은 윤회로부터 해탈하여 괴로움이 그치게 된다.

滅聖諦
Nirodha
셋째는 괴로움은 멸할 수 있으며 괴로움을 없앤 상태가 열반이라고 하는 멸성제(滅聖諦)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 즉 알지못함이니, 알면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이 멸성제의 원리를 가장 수려하게 설명한 경전이 바로 그 유명한 반야심경이다.

道聖諦
Marga-satya
넷째는 괴로움을 멸하기 위한 8가지의 바른 수행방법, 즉 팔정도가 있다는 도성제(道聖諦)이다.
괴로움의 멸함을 설명한 후 도성제가 등장함은 곧 괴로움을 멸하는 깨달음(앎)이라는 것이

결코 '머리로 깨치는 이론'이 아니며, 평생을 수행해나가는 팔정도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즉, 깨달음(열반)으로 가는 길은 없으며, 길이 곧 깨달음(열반)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숫타니파타

  • 동굴8게송[6]: 동굴[7]에 매여 머물지 말고, 떠나라.
  • 사악8게송[8]: 내 견해가 옳다고 여겨 이를 가지고 자신을 뽐내거나 남을 비난하지 않는다.
  • 청정8게송[9]: 보고 듣고 느껴서 이해하는 어떠한 것에서도 결점없이 완벽하고 순수한 것은 없기에, 그것이 있다고 판단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 최상8게송[10]: 최고라 보는 게 있어서, 그렇지 않은 것들을 낮추어 보지 않는다.

'동굴'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즐거움이 충족되기 때문에 이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상태를 말한다. 반복되는 편안함에 익숙해져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동굴에서 나오지 않는 것'에 비유했다. 이 익숙해진 편안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언젠가는 충족되지 못하며, 이때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11] 의미를 넓히면, 집, 재산, 연인, 가족, 권력 등등도 동굴과 마찬가지이므로, 동굴을 버리고 밖으로 떠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사악'은, 내 견해가 온전히 옳다고 여겨, 이를 가지고 ‘나는 이러하다’며 자신을 뽐내거나, '너는 이렇지 못하다'며 남을 비난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이 옳다거나 그르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남들이 비난해도 마음은 고요하다.

'청정'은, 세상에 완벽하고 순수한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진리로 여겨 이리저리 찾아다니고 추구하는 것은, 허구일 따름이고 사람의 욕망이라는 것. 진리를 왜 찾아다니는 것인가? 진리를 찾아다니는 사람은, 오직 그 찾아다님을 멈추었을 때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 세상에 결점없는 완벽한 진리가 있을까? 있다하더라도 완벽한 것이란, 삶을 더 힘들고 지치게 만들 뿐이다.

'최상'은, 은연중에 어떤 것을 높게 평가하면, 그렇지 못한 것들은 하찮은 것들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지식이나 가르침, 또는 다수 대중의 판단을 기준으로 삼아 서로 비교해서, 이를 내 판단의 근거로 삼지 않아야 한다. 어떤 지식(또는 대상)을 기준점으로 삼으면[12], 그 지식(대상)에 못 미치는 현실에는 불만이 생기고 마음의 평온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합쳐보면, 감각적 쾌락이 반복되어 괴로움이 되는 동굴[13]에서 벗어나며, 내 견해가 옳다고 여겨 이를 가지고 자신을 뽐내거나 남을 비난하지 않고, 어떠한 가르침도 마음을 평온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이를 찾아다니지 않으며, '어떤 지식을 기준'으로 삼아 비교하여 현실이 그 앎보다 미치지 못하면 실망하게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매달리지 말고[14], 싸우지 말며, 깨달음을 찾아다니지 말고, 비교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온(해탈)을 얻는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간단한 진리.[15][16] 또한, '동굴'은 이전에 해왔던 것들에 대한 집착, '사악'은 자신의 견해에 대한 집착, '청정'은 완벽에 대한 집착, '최상'은 비교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 불교 관점에서 동굴, 사악, 청정은 차례대로 탐(탐욕[17]), 진(성냄[18]), 치(망상[19])에 해당되며, 마지막 최상8게송은 '비교'라 정의 내릴 수 있는데 '비교'는 탐진치에 해당하는 바가 없다.[20] 또한 12연기 중 4취(4取)와 비슷하다. [21][22]

그럼 이러한 동굴, 사악, 청정, 최상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숫타니파타에서 말하기를, 지각[23]에 의한 어떤 앎에 대해서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화[24]를 가라앉히는[25] 방법이라 하였다. 또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건에 개념을 확장시키고 의미를 부여하여(Papañca nāmarūpa) 이것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괴로워하는데, 이 생각을 잡지 않고 놓아버리며 이 생각에서 붙어있지 않고 거리를 두어야, 감정이 격해질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자 깨달음이다.

 

 

 

'기타.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RPCS3 (PS3 에뮬)  (0) 2019.05.06
아웃룩 자동회신 빈도  (0) 2019.04.24
OBS 설정  (0) 2018.12.27
트위치 확장 프로그램  (0) 2018.12.18
통계 / 지역별 인구  (0) 2018.09.07

+ Recent posts